[엘르보이스] 회피형, 네 머릿속을 열고 싶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엘르보이스] 회피형, 네 머릿속을 열고 싶어

상대방을 위해서, 나는 기꺼이 안정형이 될 수 있을까?

정소진 BY 정소진 2024.02.19

회피형의 썸, 네 머리를 열어보고 싶어  

‘카톡’ 읽고 씹히기, 안 읽고 씹히기. 더 답답한 건 어느 쪽일까? 내 경우엔 전자다. 며칠 전 좋은 마음으로 다가간 남자에게 ‘읽씹’을 당했다. 우리는 이성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훌륭한 대화를 나눴고, ‘플러팅’이라 할 만한 멘트도 오갔다. 식사 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그 남자는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줬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헤어질 때 손도 잡았다. 이후 ‘잘 자’라는 내 메시지를 읽고도 이틀간 잠수. 찝찝한 마음에 다시 보낸 ‘다음주에 만날까요?’에 대한 대답은 ‘괜찮겠어요?’였다. 이런 답장을 보낸 그를 변호해 본다. 아마 내가 말했던 월간지 에디터의 마감 일정을 기억해 주는 것일 거라고. 하지만 ‘아마 괜찮을 것’이라는 내 답장에 또 묵묵부답. 어쩌라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혼자 짜증을 부렸다가 갑자기 억울해졌고, 급기야 내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스스로 내린 결론. 혹시 이 남자는 회피형 인간인 걸까?
 
애착 연구 전문 정신과 의사이자 〈그들이 그렇게 연애하는 까닭〉을 쓴 아미르 레빈은 애착 유형 중 하나인 회피형의 특성을 몇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지만 상처받기 두려운 마음에 애정 욕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둘째,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두며 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 셋째,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숨어버리거나 남 탓으로 돌린다. 넷째, 상대방이 헷갈릴 만한 행동을 많이 한다.
 
‘읽씹남’의 연락 패턴만 봐도 그는 애정에 욕구가 없어 보였다. 일말의 욕구가 있다면 관계 지속을 위해 상대방에게 말도 안 되는 답장이라도 보낼 텐데. 소통을 끊었다는 점에서 독립성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소통이 끊겼으니.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남 탓으로 돌린다는 것도 아직 모르겠다. 문제가 발생할 만큼 더 진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숨어버린다는 특성에는 부합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특성처럼 나는 지금 충분히 헷갈리는 중이다. 그가 나와 대면해서 보인 행동과 비대면으로 보인 행동이 너무 달랐으니까. 그저 ‘읽씹’만으로 이 남자를 회피형 인간이라 생각한 내 판단이 비약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만남이 이어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애프터 서비스다. 연락도 서비스의 일환이다. 그는 서비스에 무심했다. 아무튼 그는 회피형 인간이 맞다.
 
 
이 남자를 다시 밖으로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애착 효과〉 저자이자 심리학의 애착 이론을 연구해 온 저널리스트 피터 로번하임의 말에 따르면 회피형을 동굴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애착 유형은 안정형이다. 안정형은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 거리낌이 없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으며 적당한 친밀감을 누릴 줄 안다. 상대와 너무 친밀해질까 봐 혹은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안정형의 특징. 이에 더해 아미르 레빈은 밀고 당기기를 하지 않고 용감하고 정직하게 상대방을 대할 것, 비난 대신 격려해 줄 것을 권유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안정형이 되지 않으면 이 관계의 미래는 희미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안정형과 불안형을 동시에 갖춘 인간이다. 관계 초반에는 불안형의 특징처럼 애정을 갈구하다가도 관계가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판단되면 안정형이 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애착 유형이 평생 지속될 가능성은 70~75%라 한다. 애착 유형이 바뀔 가능성은 30%. 낮은 듯하면서도 꽤 높은 수치다. 하지만 그 30%에 내 감정과 시간을 베팅하고 싶지는 않다. 이 남자를 바꾸는 데 애쓰는 대신 그의 생각과 마음이 궁금한 내가 바뀌려고 한다. 지금까지 안정형 인간만 만나온 내게 회피형이라는 새롭고 이상한 세계를 열어준 그에 대해 알고 싶으니까.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용기와 직진할 줄 아는 기세를 보여줘야겠다. 이 게임은 장기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느긋하고 조심스럽게 그가 던지는 ‘퀘스트’를 하나씩 깨나갈 생각이다. 용감하게 그를 동굴에서 탈출시켜 주리라 마음먹고 카톡 창을 열어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어본다. ‘뭐해요?’ 
 
 
정소진
〈엘르〉 피처 막내 에디터. 다양한 또래 여성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며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재미난 사랑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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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정소진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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