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RISE, 마야 여성들이 이룩한 것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SUNRISE, 마야 여성들이 이룩한 것들

다시 해가 뜬다. 지금 과테말라의 마야인 여성들이 함께 손잡고 이룩해 낸 눈부신 성취들 틈새로.

전혜진 BY 전혜진 2024.03.19
마야인은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연유산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이다  .  그   주축이   되는   행동   공동체  ‘ 초르티  (Ch’orti’)’ 의   여성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울창한   열대우림   앞에   서   있다

마야인은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연유산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이다 . 그 주축이 되는 행동 공동체 ‘ 초르티 (Ch’orti’)’ 의 여성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울창한 열대우림 앞에 서 있다

 “놀라운 성과였어요. 우리가 뭉치면 얼마나 많은 걸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줬죠.” 과테말라 산후안 코말라파 지역에 거주하며 지난 15년간 마야어로 영적 지도자를 의미하는 ‘아으크이흐(Ajq’ij)’로 활약한 36세 여성 로사리오 투육(Rosario Tuyuc)이 말했다. 새까만 눈동자와 유쾌한 웃음소리를 지닌 그가 ‘놀라운 성과’라고 언급한 사건은 바로 2024년 1월 14일, 과테말라의 새 대통령 베르나르도 아레발로(Bernardo Are´valo)의 취임이다. ‘부패 척결’을 내세운 그는 지난해 8월 압도적 승리로 당선됐지만 검찰과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전방위적 압박으로 취임식을 올리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투육을 필두로 한 수천 명의 마야인은 더 나은 과테말라의 미래를 위해 지난 몇 달간 시위를 주도하며 국제사회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민주주의를 향한 1700만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며 과테말라의 취약한 민주주의를 보호 해 낸 것이다.
 
 
열대   정글로   둘러싸인   마야인들의   묘지  .  과거   식민   지배   당시   피해자들의   무덤이   포함돼   있다

열대 정글로 둘러싸인 마야인들의 묘지 . 과거 식민 지배 당시 피해자들의 무덤이 포함돼 있다

늘 마야 전통의상을 입는 투육은 16세기 스페인이 중앙아메리카를 침략할 무렵, 그 땅을 지키던 고대 마야인의 후손이다. 이후 170년간 마야인들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유럽의 신식 무기와 범람하는 질병에 속수무책이었다. 식민지 기간 동안 마야인들은 강제로 스페인어를 배우고,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고대 문헌들은 불태워졌고, 전통문화와 종교는 웃음거리가 됐으며, 대부분의 원주민은 지배자들의 대규모 농장에서 노예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야족은 결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핍박 속에서 은밀하게 살아남은 그들의 관습과 문화는 지금 불씨를 더 크게 피워내려는 중이다. 마야 문화의 상징인 ‘불의 의식’이 거행되는 코말라파 외곽의 작은 숲 ‘오쉴라후흐 카메(Oxlajuj Came)’, 즉 ‘조상들의 장소’에서 투육이 이 흐름을 설명한다. “지난 몇 년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마야 조상들의 영혼에 경의를 표하고, 그들과 다시 연결되려 합니다. 더 많은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시작했어요.”



 
한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로사리오   투육은   마야인의   영적   지도자다  .  내전   이후   많은   시체가   발견된   숲에서   마야   전통의식을   행하는   중이다  .

한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로사리오 투육은 마야인의 영적 지도자다 . 내전 이후 많은 시체가 발견된 숲에서 마야 전통의식을 행하는 중이다 .

이런 움직임은 2020년, 약 300명의 원주민 여성이 소속된 ‘원주민 여성 플랫폼’(Plataforma de Mujeres Indígenas)’의 창설로 추진력을 얻었다. 과테말라 원주민들의 권리를 위해 일생을 바치며 199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리고베르타 멘추(Rigoberta Menchu´) 또한 이 조직의 일원. 이들은 모든 정치적 · 경제적 · 문화적 계층의 마야 여성 권리 증진을 목표로 원주민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점진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성과를 내고 있다. 
 
 
초르티의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이   열대   정글이   내려다보이는   묘지에   서   있다  .

초르티의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이 열대 정글이 내려다보이는 묘지에 서 있다 .

오늘날 투육과 같은 젊은 여성들은 고유의 역사와 문화,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당한 지위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주도한다. 방식은 예술과 전통 공예, 농업 교육의 개편, 고대 영적 관습의 부흥을 통해서다. “모든 것에는 생명이 있어요. 땅과 나무, 돌, 바람, 불…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에도 있죠. 그러니 제 임무는 유럽의 침략자들이 강요한 방식 외에 생명을 잉태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또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호수의   부둣가에   매달려   있는   마야   전통   오브제들  .  마야   여성들은   수공예   전통을   계승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한다  .

호수의 부둣가에 매달려 있는 마야 전통 오브제들 . 마야 여성들은 수공예 전통을 계승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한다 .

그중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연유산을 지키는 것. 이들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여기는 지구와 아주 깊은 관계를 맺는다. 자연과 맺은 유기적 관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연재해든 인간 개입이든 모든 위협으로부터 영토를 보호하는 데 적극적이다. 지속 가능한 측면에서 식물과 자연 에너지에 풍부한 지식을 가진 이들은 전 세계의 칭송을 받기도 했는데, 마야의 농업과 전통 의학은 유엔에서 발표한 ‘기후 변화의 재앙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여덟 가지 지속 가능한 토착 식량 시스템’에 대한 보고서에 포함되기도 했다. 약 1만여 명으로 구성된 마야 공동체 ‘초르티(Ch’orti’)’는 착취로부터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지난 6년간 현지 광산회사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그 결과 과테말라 대법원이 채굴 면허를 정지시키는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야   공동체  ‘ 칵치켈  ’ 이  11 월  30 일   마야의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신성한   불   주위에   모였다  .

마야 공동체 ‘ 칵치켈 ’ 이 11 월 30 일 마야의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신성한 불 주위에 모였다 .

물론 이들의 승리는 여전히 일부일 뿐이다. 마야족의 정체성과 과테말라 원주민의 권리를 회복하는 일은 그렇게 순조롭지 않다. 과테말라는 불행한 과거를 안고 있고, 마야인들은 수 세기에 걸친 억압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마야인은 적절한 교육과 취업 기회가 부족한 낙후 지역에 살고 있으며, 과테말라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하는 여성에게 그 기회는 더욱 드물게 찾아온다. 원주민 여성 66.7%에게만 교육 기회가 주어질 뿐 아니라 10명 중 1명만 공식적인 경제활동을 한다는 연구조사 결과도 있다. 심지어 지배 계층의 헤게모니는 오랫동안 마야족의 관습을 악마로 묘사하며 탄압해 왔다. “그들은 우리 뿌리가 되는 불을 일종의 ‘사술’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불은 과거를 기억하고 몸과 영혼을 정화하고, 인생 지침을 구하는 전통이죠. 일부는 제게 ‘마녀’라는 꼬리표를 붙여왔지만,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저 웃지요. 마야 여성들이 사회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정당한 자리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마녀의 짓이라고 한다면, 저는 기꺼이 마녀가 되겠어요.” 투육이 뜨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호수에서   목욕   중인   어느   마야인   여성

호수에서 목욕 중인 어느 마야인 여성

 투육이 거행하는 불의 의식은 과테말라 곳곳에 있는 고대 마야 도시에서도 열린다. 마야인에게 ‘폐허’가 아닌 ‘에너지가 흐르는 장소’로 불리는 이 지역은 1960년부터 36년간 악명 높은 과테말라 내전 희생자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던 곳이기도. 당시 과테말라를 통치했던 군사정권과 좌파 게릴라 부대 간의 갈등으로 시작된 전쟁은 반군을 숨겨주고 지원한다고 의심되는 원주민을 초토화하는 정책으로 변했다. 전쟁 중 20만 명 이상 실종되거나 사망했으며, 대부분이 정부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납치 · 고문 ·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UN이 후원하는 역사해명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육군의 비열한 전술 희생자 83%가 마야 원주민으로, 이들은 아들 혹은 남편이 군대에 징집된 뒤 성폭행당했고 이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지역 화가인 40세 여성 에스테르 미사(E´ster Miza)는 그림으로 이 참상을 알린다. “그런 과거를 듣는 건 정말 참담했어요. 잠도 잘 수 없어서 심리치료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으로 회복하려 한 끝에 피해자들이 제게 공유해 준 내용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었죠.” 끔찍한 과거를 거론하는 것은 많은 과테말라인에게 여전히 금기시된다. 미사는 이웃들에게 ‘군인을 그리는 사람’이라 조롱당하고, 가족조차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이를 인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학교를 돌아다니며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들과 대화합니다. 제 그림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입니다. 우리 역사를 잊을 수는 없지만, 이런 노력으로 역사의 반복을 막을 수는 있을 거예요.”
 
 
옥수수를   공동   수확   중인   마야   여성들  .  옥수수는   마야   전통   문화유산의   일부이자   필수   작물  .

옥수수를 공동 수확 중인 마야 여성들 . 옥수수는 마야 전통 문화유산의 일부이자 필수 작물 .

해가 뜨는 것처럼 느리지만, 고대 마야 문명의 일원으로서 문화적 권리와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일군 변화는 시작됐다. 2019년 ‘마야 맘(Maya Mam)’ 공동체의 여성 인권운동가인 텔마 카브레라(Thelma Cabrera)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0%가 넘는 득표율을 얻었고, 2022년 과테말라 법원은 내전 중 다수의 마야 원주민 여성을 대상으로 강간과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군인 다섯 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지난 몇 년간 몇몇 원주민 공동체는 조상의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등록해 원치 않는 채굴이나 농업 착취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다시 투육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코말라파처럼 가톨릭 신앙이 팽배한 마을에서도 종교적 기원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렁인다. 그녀는 최근 기독교식 결혼 대신 전통 마야 의식을 택한 부부의 주례를 섰다. 그녀의 작은 집에서 비밀일지라도 의식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물론 그들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옵니다. 제게 ‘여기 왔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죠.” 하지만 투육은 이에 좌절하기보다 자신과 마야 운동가들이 걸어온 길에 점점 빛이 드리운다는 증거로 여긴다. “우리 피에는 마야 유전자가 내재돼 있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계속 저를 찾아올 거예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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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전혜진
    포토그래퍼 MATILDE GATTONI
    writer MATTEO FAGOTTO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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