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어른의 배움에는 자발적 의지라는 힘이 있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엘르보이스] 어른의 배움에는 자발적 의지라는 힘이 있다

"그분은 어른이니까 스스로 힘을 냈나 봐요" 40대에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한 황선우 작가가 느낀 것

이마루 BY 이마루 2024.03.26

배움의 발견  

3월을 넘기면서 다이어리 기록에도 조금씩 빈 공간이 많아지고, 가공식품을 덜 먹거나 스마트폰 사용을 줄이겠다는 결심도 어느새 현실에 굴복한 걸 느낀다. 그래도 새해에 시작한 일 중 용케 지치지 않고 이어가는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플루트를 배우는 것이다. 나는 원래 리코더를 분다. 코로나19 시기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놀이인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작은 동네 서점에서 음악회를 열고 300석 규모의 북 토크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팬데믹은 끝났지만 리코더. 실력은 남았다. 레드벨벳의 ‘피카부’, 뉴진스의 ‘Ditto’, 엘가의 ‘사랑의 인사’, 엔니오 모리코네의 ‘가브리엘의 오보에’…. 이런 곡을 단순한 플라스틱 악기로 표현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한편 좁은 음역대와 작은 음량이 아쉬울 때도 있었다. 리코더와 비슷한 관악기를 배우면 어떨까? 내 미약한 질문에 친구가 우렁찬 응답을 보내왔다. 딸이 사용하던 플루트를 빌려줄 테니 연습해 보라는 제안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시기가 늦가을이었다면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될 것을…. 하필이면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1월이었다. 그렇게 청룡의 기운과 타인의 성장에 관심이 많은 내 용띠 친구의 협업으로 플루트 초보생활이 시작됐다.
 
어쩌다 보니 목요일에는 플루트, 토요일에는 중국어 수업을 들으며 느낀 것. 40대에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일과 40대에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이걸 시작해서 유창해지거나 밥벌이에 활용할 가능성이 없다는 게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뇌나 관절이 ‘말랑말랑’한 시절에 시작했더라면 빠르게 늘었을 텐데, 둘을 외우다가 하나는 잊어버리면서 ‘울퉁불퉁’ 더디게 나아간다. 그저 정해진 구멍을 손끝으로 짚었을 뿐인데, 자려고 누우면 어찌나 손가락 마디마디가 뻐근하고 팔꿈치가 아린지. 아마  소리를 내느라 온몸에 힘을 주고 용을 써서 그럴 것이다. 뭘 배워도 ‘힘 빼기의 기술’은 거의 필수적이다. 일하고 운동하고 집안일 돌보는 루틴을 따라 지내다 보면 1주일에 한 번 수업을 받고 매일 일정하게 연습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이걸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재미있다는 사실이 나를 이끈다. “메뉴판 좀 주시겠어요? 독일 맥주 세 잔 주문할게요.” 몇 가지 외국어 단어를 외우고 배운 문장 구조를 결합해서 입 밖으로 낼 때와 친숙한 멜로디를 숨으로 따라갈 때 느끼는 기쁨은 서로 닮았다.  
 
 
남들은 수월하게 해내는 것 같은 연주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하면서 그간 심상하게 들었던 플루트 연주와 그 소리의 창조자에게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내게 되었다. 곡마다 시범을 보여주는 플루트 교습 원장님은 물론이고, 나보다 앞 시간에 수업을 받는 세상 심드렁한 초등학생 ‘선배님’도 마찬가지다. 저 초등학생 선배님만큼이라도 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 몇 년 더 배우면 가능할까? 그런데 원장님 말씀에 따르면 어린이들이라고 반드시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란다. “어른들은 집에서 연습해 오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생각이 너무 많아요. 아이들은 연습도 안 해오지만 별생각을 안 하고 그냥 불지요.” 큰 깨우침이었다. 아이들은 생각하는 대신 그냥 하는, 김연아 선수 같은 태도를 갖고 있었구나. 그냥 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계속할 수 있구나. 그런데 아이들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을까? 몇 년을 더 해야 어느 정도 수준에 닿을지 하는 생각조차 안 하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걸까? 너무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에조차 생각이 많은 어른이었다.
 
두 달째 접어든 플루트 연습은 여전히 더디다. 훌륭한 음악만 골라 듣는 청취자로 살아온 어른의 귀에는 형편없는 스스로의 연주를 견디는 일 또한 연습의 괴로움에 포함된다. ‘반짝반짝 작은 별’은 충분히 반짝이지 않고, ‘노래는 즐겁다’는 서글프게 들리며, ‘환희의 송가’는 처절함의 송가로 들린다. 하지만 쑥쑥 눈에 띄게 성장하는 신록과는 다르게 어느 날 살며시 고개를 내미는 이파리를 발견하는 희열도 세상에 있는 법이다. 어른은 자신이 어렵게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내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안다. 학원 가기 싫을 때 등을 떼미는 엄마가 없어도 퇴근 후에 스스로 연습해 올 줄 안다. 무념무상의 집중력, 흡수력이 좋은 두뇌, 유연한 손가락은 어린이의 것일지 모르나 어른의 배움에는 ‘자발적 의지’라는 힘이 있다. 한국에서 10년 생활한 중국어 선생님은 가끔 좀 어색한 한국어 표현을 쓰곤 한다. 할아버지인 어느 학생이 처음에는 발음과 성조를 정말 어려워했지만 마지막 과정을 마칠 때 훨씬 나아졌다는 말씀을 하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성인이니까 혼자서 스스로 힘을 냈나 봐요.”  어른이 되어서도 뭔가를 배운다. 그 과정에서 혼자서 스스로 힘을 낸다. 세상은 영원히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황선우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운동 애호가. 인기 팟캐스트 〈여둘톡〉 공동 진행자로 지면을 넘어 방송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팝업 닫기

로그인

가입한 '개인 이메일 아이디' 혹은 가입 시 사용한
'카카오톡, 네이버 아이디'로 로그인이 가능합니다

'개인 이메일'로 로그인하기

OR

SNS 계정으로 허스트중앙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회원이 아니신가요? SIGN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