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가 내 일에 가격을 붙이는 법 #여자읽는여자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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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가 내 일에 가격을 붙이는 법 #여자읽는여자

라효진 BY 라효진 2024.03.15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다 프리랜서가 됐다. 조직 밖에서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나의 노동에 값을 매기는 작업이었다. 일단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부터 장벽이었다. 많은 유교걸들이 그렇듯 나 역시 돈을 밝히는 사람처럼 보일까 걱정됐다. 생각해 보면 프리랜서의 일이라는 것이 노동력을 화폐로 교환하는 것이고, 내가 터무니없는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돈 이야기가 왜 그리 껄끄러웠을까.  

 
 
일과 돈은 분리될 수 없지만 업무 제안을 할 때 정확한 업무 범위와 비용을 먼저 제시하는 클라이언트는 생각보다 드물다. 좋은 취지의 일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돈을 얼마를 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저 협업(이라 쓰고 재능 기부라 읽는다)을 하고 싶다는 건지 헷갈리는 제안도 있고, 기껏 고민해서 견적을 제시했더니 답장이 오지 않아 허탈했던 적도 있다.
 
더 답답한 점은 내가 하는 일에 얼마를 요구해야 합당한지 나조차 잘 몰랐다는 것이다. 처음 인터뷰 외주 작업 견적을 요청받았을 때 어리둥절했다. 2010년부터 기자, 콘텐츠 에디터라는 이름으로 회사에서 일상적으로 인터뷰를 해왔지만 그 일의 화폐가치를 따져본 적은 없었다. 월급을 받고 수행하는 수많은 업무 중 인터뷰가 있었을 뿐이다. 직장인은 업계별로 연봉 테이블이라도 정해져 있지, 프리랜서 일의 단가는 업무의 성격과 범위, 프리랜서의 경력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가격표 붙이듯 ‘이 일은 얼마'라고 딱 떨어지게 제시하기 어렵다. 개별 협상을 통해 업무가 진행되기 때문에 공개된 정보도 부족하다. 각자도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행히 내게는 나보다 먼저 막막한 길을 걸어간 프리랜서 선배들이 있었다. 업무 제안을 받고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마다 프리랜서 선배들에게 SOS를 쳤다. 프리랜서를 위한 매거진 〈프리낫프리〉를 만드는 이다혜 편집장도 자주 조언을 구했던 프리랜서 선배 중 한 명이다. 프리랜서 에디터이자 기획자인 다혜님은 ‘프리랜서 권익센터'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올해로 11년 차 프리랜서인 다혜님은 자신의 저서 〈프리랜서 일하는 법〉에서 프리랜서들이 자신이 ‘노동자'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장인이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임금과 노동 조건을 확인하는 것처럼, 프리랜서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견적서와 계약서 확인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혜님은 견적서를 “내 노동의 증명서"라고 표현한다.
 
내가 받는 돈의 항목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계산해 보는 것,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값을 견적서에 포함해 보는 것은 전체적으로 내 노동에 대해 합당한 값을 받게 되는지 점검할 수 있는 방편인 동시에 클라이언트에게 노동의 가치를 설득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된다.
-이다혜, 〈프리랜서로 일하는 법〉 중에서
 
솔직히 견적서를 쓰다 보면 마음이 쪼그라든다. ‘내가 이 정도 돈을 달라고 할 자격이 있는 걸까?’, ‘클라이언트가 이 돈 주고는 같이 일을 못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라는 고민으로 숫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이 과정이 괴로워서 그냥 회사에서처럼 받는 돈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견적서를 내고 협상을 하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내게는 내가 해온 일, 하고 있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생긴다. 포트폴리오에 한 줄 링크로 올려둔 명쾌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세세한 노동이 필요한지 가시화하고, 노동에 대한 값을 항목별로 매기면서 내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설득한다. 그러다 보면 나조차도 ‘품은 많이 드는데 돈은 안 되는 일'로 치부했던 ‘콘텐츠 만드는 일’에 대한 자부와 책임이 동시에 생긴다. 견적서는 돈에 대한 정보만을 담고 있지 않다.
 
다혜님은 “일하는 과정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 그 흐름에 따라 챙겨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떤 태도를 가지면 좋을지 고민해 보고 일을 하는 것과 무턱대고 일을 하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라고 말한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무슨 일을, 어떤 방향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얼마를 받고 할지 클라이언트와 하나하나 협상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단순히 외주 일을 받아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만의 주도권을 갖고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 내가 타협할 수 없는 선은 어디인지, 나는 어떻게 일하고 싶은 사람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앞으로 나의 노동이 어떤 가치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지도.
 
 
여전히 ‘그래서 페이가 얼마인데요?’라고 묻기 전에는 심호흡을 한다. 그래도 이제는 돈 이야기를 해야만 일이 제대로 시작될 수 있음을 안다. 돈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도. 프리랜서로 무럭무럭 자라서 나도 누군가에게 유용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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